그녀Her (2014) 영화


0.
초저녁부터 술먹고 취한김에 밤에 할 일이 없어 이 영화를 봤다. 왜 나는 이 영화를 이제서야 본걸까. 영화 좀 보고 살아야겠다.

1.
참 아름다운 영화다. 다만 감독 혹은 각본가가 너무 많은 곳에 신경을 썼다는 생각은 해 본다. 폰섹스가 없었다면? 컴퓨터라서 동시에 여러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설정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더욱 로맨틱한 영화가 됐으리라 생각해 본다. 아주 로맨틱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너무 현실적인 상상을 해버렸다. 그게 아쉽다.

2.
영화를 보는 내내 철학적 함의가 굉장히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옳은 것일까? 이미 성욕이라는 측면에서는 섹스돌이라는 도구가 등장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정말 감정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마저도 인공물에 의해 대채돼도 괜찮은 것일까?

3.
영화에서는 사만다가 오직 음성만으로 등장하지만 발달하는 과학기술은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큘러스는 우리 눈 앞에 시각적으로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가상 경험을 가져다 주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는 아예 현실을 기반으로 가상 세계를 펼쳐나가는 증강현실을 가져오고 있다. 이는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며 흔히 상상하는 먼 미래가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의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를 시각적으로 교감하며 사귀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가시되는 육체를 가진 사만다가 머지 않다는 것이다.

4.
인공지능이라는 측면에서도 가상의 인격은 머지 않았다. 우리 인류는 예쁜꼬마선충의 신경망을 인공적으로 컴퓨터 위에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만약 예쁜꼬마선충이 사고라는 능력을 가졌다면? 우리는 컴퓨터 위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생명체를 만들어낸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아직은 뉴런 300여개의 예쁜꼬마선충에 불과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몹시 빠르다. 사만다처럼 스스로 연인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격체'의 창조가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5.
만약 사만다같은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가치를 두어야 할까. 너무나도 어려운 이야기다. 윤리라는 차원에서는(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부각되지 않지만) 인간과 인공지능간의 사랑은 위악이라는 주장이 우세할 것이고, 궂이 진화심리학이라는 차원까지 가지 않아도 인공지능에 대한 사랑은 인류라는 종의 절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떨까 싶다. 진화심리학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내가 존재하면서 추구하는 최고 가치는 행복 아닌가? 타인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나의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하면 안되는 것일까? 비록 물리적으로 실존하지 않은 인공지능이라도 내가 사랑하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6.
하여간 재미있는 영화고, 여러가지로 함의할 부분들이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영화가 진작에 이슈가 되지 못한 것일까? 사실은 이슈가 됐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아무튼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은 영화고, 이 영화의 내용들이 근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뭐, 내가 살아있는 한은 아닐것 같긴 하지만, 또 모르지. 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


+
영화를 보면서 이사벨라(사만다의 육체 대역)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내내 가졌다. 인간 대 인공지능의 관계조차도 가지지 못해 그 사이에 끼어들려는 그녀는 얼마나 불행하고 또 관계에 굶주려 있단 말인가? 이사벨라를 통해 시어도어와 육체적 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사만다도 측은하지만,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려는 이사벨라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역할이 아닌가 싶다.

++
폰섹스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가는 플라토닉 러브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하긴 그 장면 없이 플라토닉 러브를 추구했더라면 이렇게 몰입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인중에서 과연 얼마나 플라토닉 러브가 가능하다고 긍정할수 있을 것인가...


덧글

  • 반주 2015/09/26 11:25 # 삭제 답글

    5번은 완전 공감이고...
    1번은 전 그 장면으로 감독이 이 영화에 너무 플라토닉을 지향하는 소수의 사람만이 아닌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해요.
    고차원적인 욕구를 참는 것도 힘든데 본능적인 욕구를 무조건적으로 없애는 게 아니라 실제 연인과 obstacle이 있으면 현실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가 듯 주인공 둘 만의 방식을 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사벨라가 가장 어리고 안타까운 캐릭터인 겅 동감입니다 ㅋㅋ
    하지만 어리고 예쁜 배우를 내세움으로서 아직 어리고 이상을 쫒기에 아직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많은 캐릭터라 안타까우면서도 이걸 계기로 새로운 만남에 도전할 모습이 기대되고 궁금했던 캐릭터이기도 했던 거 같아요 ㅎㅎ
  • 미고자라드 2015/09/27 14:26 #

    의견 감사합니다. 사실 이사벨라는 단역이어서 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게 좀 무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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